허리 높이까지 자라고 이삭에 거친 강모가 달린 보리는 인류와 역사를 함께한 강인한 곡식입니다.
보리는 약 1만년 전에 곡식으로는 처음으로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 재배되었습니다.
야생 식물이 성공적으로 대를 잇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보리 역시 원래는 종자가 익자마자
바로 땅에서 떨어지도록 진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수확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작업을 더디에 하는 끔찍한 특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낱알이 꽃대에서 떨어지지 않는 돌연변이 보리를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일부러 그런 보리를 골라서 심고 마침내 모든 낱알이 확실히 이삭에
붙어 있는 세대가 나올 때까지 그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덕분에 곡식을 수확하기는 말할 수 없이 쉬워졌지만 ,
이제 이 식물은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의해서만 종자를 퍼뜨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리와 밀 등 곡식을 재배한 덕분에 인간 사회는 한곳에 정착해 도시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4000년 무렵에는 보리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재배되었는데 ,
그 지역은 빗물이 아닌 범람하는 강물로 땅에 물을 댔기 때문에
토양의 소금기에 강한 보리가 밀보다 훨씬 유리했습니다.
기원전 1800년에는 보리가 유라시아의 주요 곡식이 되었는데 ,
로마 시대에는 부유한 이들이 밀을 선호했지만 지중해 동부에서는 여전히
보리가 주식이었고 사람들은 보리로 죽이나 플랫브레드 (효모를 사용하지 않은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로마에서 곡물과 농업의 여신인 케레스는 손에 밀이 아닌 보릿단을 들었고,
콩과 곡물로 채식하며 수련한 로마 검투사들은 ‘보리를 먹는 사람’이라고 불렸습니다.
보리는 성장기가 짧고 가뭄이나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며 높은 위도나 고도에서도 잘 견디는 믿을 만한 작물입니다.
또한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와 당 조절을 개선하는 식이 섬유가 이례적으로 혼합된 뛰어난 식품이기도 합니다.
겉껍질을 제거하여 매끄럽게 만든 보리쌀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스튜에 넣거나 과일 , 견과류와 섞어 죽을 만들거나 양념하여 샐러드를
만들어 먹는 중동이나 서아시아 지방을 제외하면 안타깝게도 보리는 사람의 먹거리로는 과소평가 되고 있습니다.
보리의 주요 용도는 동물의 사료 또는 술을 빚는 재료로 주로 이용됩니다.
4천 년 전 , 오늘 날의 이라크 남부에서 수메르인들은 맥주를 문명의 증거로 생각했는데,
아마도 잘 정착된 공동체가 보리 재배에 필수적이기 때문이이였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맥주는 설형 문자로 쓰인 문헌에 종종 등장하기도 합니다.
기원전 1800년경에 제작된 점토판에는 양조 과정을 서정적으로 설명하고
맥주의 여신인 닌카시에게 바치는 찬가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고대의 시는 “그대가 잘 걸러진 맥주를 부을 때면 ,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콸콸 쏟아지는 듯하네” 라고 애태우듯 토로했지만
정작 제조법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수메르 양조업자들은 보리빵과 물을 섞어 발효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오늘날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호밀빵을 이용해 상쾌한 저알코올 음료인
크바스를 만드는 방식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맥아를 만드는 과정은 술을 빚는 데 적합한 보리의 생화학적 특성을 이용합니다.
곡물을 물에 담아 발아하기 시작하면 종자 속 풍부한 녹말을 생장 여료인
당분으로 바꾸는 효소가 분비됩니다.
일주일 정도 지나 싹이 튼 보리에 열을 가해 발아를 억제시킨 다음 효모를 넣으면
말토스와 다른 맛 좋은 당분을 추출하며 발효됩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이 발효액을 증류하여 위스키로 만들기도 하며, 심지어 그 혼합물에 보리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특히 독일은 보리를 이용해 까다롭게 술을 빚어왔습니다.
보리는 호프, 물, 효모와 함께 맥주순수령이 유일하게 허락한 네가지 맥주 재료 중 하나입니다.
1516년에 제정된 이 법은 불순물이 섞인 질 낮은 맥주를 금지했고 (그리고 귀중한 밀을 빵 굽는데 사용했고)
덕분에 독일 맥주의 품질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지 모르지만 한결같은 맛과
다양성이 주는 즐거움 사이에서 긴장감을 조성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맥주 순수령은 1993년에 폐지되었습니다.